6.25전쟁 과 김 일 성 그리고 스탈린
6.25동란 관련 모든 자료는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스탈린이 승인,
지원하고 협력함으로써 일어난 민족최대의 비극으로 밝혀졌다.
1949년 3월 5일 소련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공식회담을 마친 후 1949년 3월 7일 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
남한 공격을 스탈린이 허용해주고 지원할 것을 건의했다.
이때는 스탈린이 3.8선에 관한 미소합의는 유효하며
전쟁(戰爭)발발 시 미국개입(介入)가능성이 크고
북한군이 남한 군에 대한 절대 우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김일성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 시기 스탈린은
북한의 군사력 증강노력을 지지하고
육해공군의 강화를 위한 원조를 제공했다.
그러나 1949년 중엽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남한 주둔 미군이 470여명의 미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전원 철수를 단행했고(1949.6.30)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핵보유국가로 등장, 미국의 핵독점을 종식시키고(1949. 8)
중국의 공산군이 대륙장악(大陸掌握)에 성공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1949.10.1)
이와 동시에 1950년 1월 12일 Dean Acheson 미 국무장관(國務長官)은
워싱턴 기자협회의 연설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필리핀에서 유구열도,
일본을 지나 알류산(Aleutian) 열도로 이어진다고 밝히고
이 방위선 밖의 지역에 대한 침공은 일차적으로 지역주민이 저지하고
유엔헌장에 의하여 모든 문명세계의 개입에 의존(依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김일성의 남침야욕(南侵野慾)에 다시 불을 붙였고
소련도 새로운 정세를 중국에 이어 한반도의 공산화라는 전략목표를 고려하게 되었다.
김일성(金日成)은 1950년 3월 30일 재차 소련을 비공식(非公式) 방문, 4월 25일까지 머물면서
세 차례에 걸쳐 스탈린과 남침계획을 검토한 후 스탈린으로부터 남침(南侵) 허락과 군사원조(軍事援助),
필요한 전략지원을 확약 받고 여기에 유사시 중국군 지원계획까지를 합의한 후 귀국했음이 자료에 의해 밝혀졌다.
이런 관점은 Nikita Khrushchev 회고록에서도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