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詩

그날이 오면 ㅡ심 훈 ㅡ

낙동강사랑 2021. 1. 31. 04:59

그날이 오면

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고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생애[편집]

1901년 경기도 과천군(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2]. 심훈의 집안은 '친일적 시류에 순응하는 전통적인 양반 가문 출신의 중산지주 계급'으로, 심훈의 두 형은 친일파였고[3], 심훈의 첫번째 부인은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청풍군 이해승(淸豐君 李海昇)의 누이 이해영(李海映)이었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현 서울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해 학교를 다니던 심훈은 4학년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3월 5일 남대문 학생시위에서 구속되어 8개월형을 받아 투옥되었고, 학교에서도 퇴학 처분을 받으면서 집안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3]

이듬해 1920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세인트 존스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921년 결국 중퇴한 뒤, 중국 항저우로 가서 저장 대학교 극문학과로 재입학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이듬해 1922년에 중퇴하고, 극문회를 조직하였다. 중국에 망명하는 동안 베이징에서 신채호이회영 등과 교우하며 열정적으로 독립운동을 부르짖었다.[3]

1924년 중국에서 돌아온 심훈은 《동아일보》에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였으며, 1926년에는 《탈회》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언론 운동단체 철필구락부가 언론옹호발표회를 계기로 일제로부터 해산 처분을 받고 (철필 구락부 사건), 심훈 역시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했다. 같은해 순종이 서거하자 지난 3·1운동과 마찬가지로 독립 운동이 발발할 것이라 예감하고 《시대일보》에 '통곡 속에서'라는 이름의 시를 게재하였다. 심훈 선생의 예견대로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3][4]

1927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를 공부하고, 식민지 현실을 다루는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집필, 각색,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상영하였다. 이후 《조선일보》에서 '동방', '불사조' 등의 소설을 연재하다가 일제의 게재 중지 조치로 연재를 중단하게 된다. 이 당시 심훈의 대표작이기도 한 《그날이 오면》은 3·1운동 기념일에 발표된 시로, 원래는 시집으로 발간될 예정이었지만 일제의 검열로 인해 출판이 거절당하기도 했다.[3]

1935년 《동아일보》가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하고, 창간 15주년을 맞아 농촌과 어촌을 배경으로 하는 장편 소설을 공모하였다. 심훈은 충남 당진에 머물며 장조카 심재영(沈載英)의 야학 운동과 공동경작회 활동을 소재로 삼아 장편 《상록수》를 공모하였고 바로 당선되었다.[3][5] 당선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해 농촌 학생들의 교육을 도우기도 했다. 심훈은 상록수를 영화화하고자 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고, 단행본 출간을 목표로 집필에 몰두하던 중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